2001. 12.『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조선후기 성리학의 새로운 탐구

- 임성주의 성리학 -


김    현


1. 心性一致: 一元的 心論의 정립

2. 理氣同實: 理․氣 관계의 새로운 설정

3. 本體卽工夫: 誠․敬의 合一的 이해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1)는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 조선 성리학의 중심 주제였던 ‘심(心)의 윤리성’ 문제를 탐구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수립한 인물이다.

  율곡(栗谷, 李珥 1536-1584)이 퇴계(退溪, 李滉 1501-1570)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반대하고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펼친 이후 그를 계승하는 기호지역의 성리학자들에게는 기로 인해 발현하는 인간의 정신현상[心]이 도덕 실천 능력을 구비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율곡은 이(理)의 자발성을 부인하였는데, 그것은 자칫 ‘이가 사물(死物)화 되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결한 도덕성이 현상화되기 어렵게 된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파 성리학자들은 율곡이 주장했던 바대로 ‘심은 기’라고 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그 심이 인심(人心)으로만 흐르지 않고 도심(道心)으로 발현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녹문이 기호학파 성리학의 ‘윤리적 심론’을 자기 학문의 주제로 계승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젊은 시절 그의 스승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로부터 받은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순수성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도암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 등은 인물성이론자들은 이(理)를 보편적 가치의 가능적 원리로, 기(氣)는 그 이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는 자발성을 가진 질료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인간의 심도 청기(淸氣)에 의한 선한 일면과 탁기(濁氣)에 의한 악한 일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본 데 반해,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 도암 이재 등의 인물성동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성 발현의 주체가 되는 심은 비록 그것이 기에 의존하고 있다고는 하나, 청탁부제한 기품(氣稟)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스스로 기품의 혈기를 물리치는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2) 성인과 범인의 심체(心體)와 명덕(明德)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맹자 성선(性善)의 취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

  인물성동론자들의 이같은 입장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 주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 능력의 근저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녹문의 임성주의 철학은 바로 인물성동론자들의 이같은 윤리적 심성론을 지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1. 심성일치(心性一致): 일원적(一元的) 심론(心論)의 정립4)


  [해설]


  성리학은 맹자가 인간 도덕능력을 받쳐주는 근거로 이야기한 ‘성선(性善)’을 보편적인 이(理)의 선(善)으로 설명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기질은 차별적인 기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을 따르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 순수한 이(理)를 자신의 본성으로 보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에 그칠 뿐 현실로 드러나는 정신과 육신의 작용은 기의 지배를 받아 선과 악이 함께 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게 된다.

  녹문이 평생 동안 탐구한 학문적 과제는 인간의 구체적 정신현상의 주재인 심이 도덕을 실현할 수 있는 순수하고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은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선’을 단지 이(理)의 선(善)으로만 이해하고 기(氣)로 이루어진 심은 유선유악(有善有惡)하가도 할 경우 선을 행한다고 하는 인간의 도덕 능력은 단지 가능성에만 그치게 된다고 판단했다. 녹문은 인간의 도덕 능력이 추상적인 성(性)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심(心)의 차원에서 확보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성과 심을 이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원문 번역]


  심(心)과 성(性)은 하나이다.  지적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달리 이름할 뿐이다.  정자는, “형체로써 이름하면 천(天)이요, 주재로써 이름하면 제(帝)요, 묘용으로써 이름하면 신(神)이요, 성정으로써 이름하면 건(乾)이다”라고 하였다.  건(乾)은 곧 성(性)이요, 제(帝)와 신(神)은 심(心)이니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에 성을 말하면 심은 저절로 지적되며 심을 말하면 성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중용』의 ‘천명지성(天命之性)’ 같은 것은 성을 말한 것이지만 그 아래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발(發)․미발(未發)을 말하였으니 성은 또한 심인 것이다. 『대학』의 ‘치지(致知)’는 심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그 아래에서 이것을 이어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있다’고 하였으니 심은 또한 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그 심을 극진히 한 자는 그 성을 알 수 있고, 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있다. 심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면 하늘을 섬길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의 뜻이 혼연하여 조금도 터지거나 꿰맨 흔적 없이 심․성의 진면목이 또렷이 드러났으니 절실하고 분명한 말이라고 할 만하다.


  心也性也一也, 在所指如何耳. 程子曰: “以形體謂之天,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以性情謂之乾.” 乾卽性也, 帝與神則心也, 其在人者亦然. 是故言性則心自擧, 言心則性在中. 如中庸天命之性是說性, 而下卽言喜怒哀樂之發․未發, 則性亦心也. 大學致知是說心, 而下卽承之以致知在格物, 則心亦性也. 故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 語義渾然無所罅縫, 而心性眞面目渾然現前, 可謂深切著明矣. (「大學」, 『鹿門集』권16 雜著, 1a)


  ‘심(心)은 악한데 성(性)은 선하다’, ‘기(氣)는 어두운데 이(理)는 밝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와 기, 심과 성을 판연히 두 개의 사물로 구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선과 악이 (인간 내면에) 상대하여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말이냐는 나무람을 면할 수 있겠는가?  .....  무릇 심기의 몸체는 실체(實體)요, 그것의 허명한 기상은 영상(影象)이다.  성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실체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겠는가, 영상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겠는가?


  心惡性善, 氣昏理明, 不但理氣心性判然作兩物. 烏得免善惡相對齊頭竝足之譏乎? .... 夫心氣本色實體也, 虛明氣象影象也. 性之具方寸者, 具於實體乎, 具於影象乎? (「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24b-25a)


  인간의 선은 기질의 선일 따름이다.  기질 밖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사람에게는 불선함이 없고, 물에는 흘러내리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고 또 “그대는 사람을 해쳐 인의(仁義)를 이루고자 하는 것인가?”라고 할 때, 단지 ‘사람’ 또는 ‘물’이라고만 했지, 거기에 다시 ‘성’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아니한 데서 그 뜻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을 말한 것은 호기(浩氣)를 말함에 이르러 그 뜻이 분명해진다.


  人性之善, 乃其氣質之善耳. 非氣質外, 別有善底性也. 故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又曰: “戕賊人以爲仁義”, 但說人字․水字, 更不擧性字, 其意可見. 故孟子說性善, 至說浩氣, 其義乃明.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5a)


  기질이 마음을 선하게 할 수 있고 악하게도 할 수 있는 이유가 어찌 다른 데 있겠는가?  바로 심이 기의 신명(神明)이 되고 기가 심의 질간(質幹)이 되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제약하기 때문이다. ....   이른바 질간이라고 하는 것은 본․말을 겸하고 정․조를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혼백(魂魄)․혈기(血氣)․오장(五臟)․백해(百骸)에는  본체와 사재가 모두 그 가운데 있다.  성인의 질간은 근본으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정미한 것이나 조악한 것이나 표리가 통연하여 모두가 정미하고 순수하여 한 오라기의 사재도 없다. 그러므로 기질의 작용에 있어서도 신명의 준칙이 아님이 없으니 더 이상 나누어 말할 필요가 없다.  중인(衆人)의 질간은 그 본체의 담일은 비록 동일하나 [原註: 이는 다만 인간의 분수가 바르고 통한 측면에서만 말한 것이다.] 유기(游氣)가 어지럽게 떠돌다가 합쳐져서 바탕을 이룰 때에 정미한 혼백이나 조악한 혈기, 내면의 오장이나 외면의 백해에 모두 사재가 섞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고요히 있을 때에는 사재가 가라앉아 본체가 맑고 투명하게 되니 이 심의 밝고 영명한 본체가 탁연히 드러나 성인과 더불어 호발의 어긋남도 없다. 그러나, 움직이게 되면, 사재가 요동하여 본체가 혼탁하게 되니 이 심의 밝고 영명한 본체도 그에 따라 어두워지고 전도되어 꺼릴 것이 없게 된다.


  氣質之所以能使此心能善․能惡者, 豈有他哉? 正以其心爲氣之神明, 氣爲心之質幹, 相爲因依, 相爲牽連故耳. .... 盖所謂質幹者, 當兼本末合精粗而言之, 魂魄․血氣․五臟․百骸, 本體․渣滓, 皆在其中. 聖人之質幹, 自本至末, 若精若粗, 表裡洞然, 都是精純, 無一毫渣滓. 故卽其氣質之作用, 無非神明之準則, 更不必分別爲說. 衆人質幹, 其本體之湛一雖同[此姑只就人分正通上言], 游氣紛擾, 合而成質之時, 精而魂魄, 粗而血氣, 內而五臟, 外而百骸, 皆不能無渣滓之雜. 是故, 方其靜也, 渣滓帖伏, 本體澄澈, 則此心昭靈之體, 卓然呈露, 與聖人無毫髮之差爽. 及其動也, 渣滓騰攪, 本體溷汨, 則此心昭靈之體, 亦隨以昏昧顚錯, 無所不至. (「答李伯訥」, 『鹿門集』 권4 書, 22a-22b)



2. 이기동실(理氣同實): 이(理)․기(氣) 관계의 새로운 설정


  [해설]


  녹문은 일원적 심체(心體)의 존재를 상정한 후 거기에서 거꾸로 유추하여 본체의 세계에 심체의 존재 근거가 되는 일원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理)와 기(氣)이와 일원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이기동실(理氣同實)’이라는 명제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됐다. 심․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의 통일적인 심체를 본체의 세계에 투영하여 그것을 우주의 일원적인 존재 근거로 삼은 것이다.

  녹문은 그 일원적인 존재 근거를 ‘기(氣)’라는 이름으로 지칭하였으며, 이 기 이외의 ‘이(理)’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였다.  녹문이 유기론자(唯氣論者)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이 같은 주장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종래 성리학에서 추구해 오던 가치관에 반대하여 이․기의 위상을 전도시키려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일원(一原)을 이(理)에만 돌리고 기(氣)를 분수(分殊)로만 이해하는 종래의 성리설을 따르게 되면 그 이(理)의 도덕성이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관념적인 가능성에만 머물게 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녹문은 기라고 하는 이름의 일원적 실체가 윤리적인 심체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것이 담일(湛一)하고 생의(生意)에 충만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 기의 쉼없는 운동에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생성되는데, 그 중에서도 인간은 담일(湛一)한 기(氣)의 정통(正通)한 응취로 태어난 존재이므로 순수한 생의(生意)의 전체를 치우침 없이 발현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본체의 차원에서 심의 윤리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원문 번역]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하나의 허원성대한 물사가 있다.  그것은 아득히 넓고 안과 밖이 없으며, 끊어짐이 없고, 가가 없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전체에 밝게 융통하고 있는 것이니 이 모두 생의(生意)로서 그 유행함은 쉼이 없고 물을 낳음은 헤아릴 수 없다. 그 몸체를 천(天)․원기(元氣)․호기(浩氣)․태허(太虛)라고 하고, 그 생의를 덕(德)․원(元)․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 하고, 쉼없는 유행을 도(道)․건(乾)이라 하고, 그 헤아릴 수 없음을 신(神)이라 하며, 그렇게 하고자 아니하여도 그렇게 됨을 명(命)․제(帝)․태극(太極)이라 하니 이는 모두 허원성대한 물사로부터 분별하여 이름지은 것을 뿐이요 그 실은 하나이다.


  莫之然而然, 自有一箇虛圓盛大底物事. 坱然浩然, 無內外, 無分段, 無邊際, 無始終, 而全體昭融, 都是生意. 流行不息, 生物不測. 其體則曰天, 曰元氣, 曰浩氣, 曰太虛;  其生意則曰德, 曰元, 曰天地之心;  其流行不息則曰道, 曰乾;  其不測則曰神; 其莫之然而然則曰命, 曰帝, 曰太極.  要之, 皆就這虛圓盛大底物事上, 分別立名, 其實一也.”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1a)


  우주의 사이에서 위 아래 곧바로, 안팎이 없이, 시종이 없이 가득차서 수많은 조화를 만들어내고 수많은 사람과 사물을 낳는 것은 단지 하나의 기(氣)일 따름이다.

여기[기로 가득 찬 우주]에는 다시 이(理)라는 글자를 안배할 조그마한 틈도 있지 아니하니, 단지 그 기의 능(能)이 이와 같이 성대하며 이와 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누가 시키는 것인가?  단지 자연히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자연처(自然處)에 대해 성인은 이름하기를 도(道)․이(理)라고 하였다. 그 기는 원래 공허한 물사가 아니요, 전체에 밝게 융통하여 겉과 속을 꿰뚫고 있는 것이 모두가 생의(生意)이다.  까닭에 이 기가 한 번 움직여 만물을 생하고 한 번 머물러 만물을 수렴한다.  발생한 즉 원(元)이 되고 형(亨)이 되며, 수렴한 즉 이(利)가 되고 정(貞)이 된다. 이것은 기의 성정이 자연에서 나와 당연이 되는 법칙인 것이다.  이 당연처(當然處)에 대해 성인은 또 이름하기를 도(道)․이(理)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자연(自然)․당연(當然)이라고 하는 것은 별도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단지 이 기에서부터 말한 것이다.  ‘연(然)’이라는 글자는 바로 기(氣)를 가리키고, ‘자(自)’ 자와 ‘당(當)’ 자는 그러한 뜻을 형용하기 위해 쓴 허사(虛辭)에 불과하다.


  宇宙之間, 直上直下, 無內無外, 無始無終, 充塞彌漫, 做出許多造化, 生得許多人物者, 只是一箇氣耳. 更無些子空隙可安排理字, 特其氣之能, 如是盛大, 如是作用者. 是孰使之哉? 不過曰自然而然耳. 卽此自然處, 聖人名之, 曰道, 曰理. 且其氣也, 元非空虛底物事, 全體昭融, 表裏洞徹者, 都是生意. 故此氣一動而發生萬物, 一靜而收斂萬物.  發生則爲元爲亨,  收斂則爲利爲貞. 此乃氣之性情, 出於自然而爲當然之則者也. 卽此當然處, 聖人又名之, 曰道, 曰理. 然而其所謂自然․當然者, 亦非別有地界, 只是就氣上言之. 然字正指氣, 而自字․當字, 不過虛設而形容其意思而已.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3a-3b)


  기의 근본은 하나일 뿐이지만 그 오르내리며 날아다니다가 서로 만나 응취하는 때에 혹 크고 작게, 바르고 치우치게, 굳세고 부드럽게, 맑고 탁하게 저절로 천차만별이 되어 그 응취에 따라 하나의 氣가 되니, 바로 장자(張子)가 이른바 ‘떠돌아다니는 기가 어지럽게 움직이다가 합쳐 바탕을 이루어 수만 가지 사람과 사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비록 말하기를 각기 하나의 기가 된다고는 하나 이른바 기의 본체는 그 가운데 존재하여 각기 응취하는 바를 좇아 발현되지 아니함이 없다.  응취하여 물이 된 즉 그 흘러내리는 것은 곧 이 기가 발현하여 물의 성(性)을 이룬 것이요, 응취하여 불이 된 즉 그 타오르는 것은 곧 이 기가 발현하여 불의 성을 이룬 것이다.  그 만난 바의 강유(剛柔)가 같지 아니한 까닭에 그 성 또한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의 생의(生意)가 하는 바가 아님이 없다. 물이 흘러내리고 불이 타오르는 것은 이 기의 한 부분 발현한 것이요, 인간의 선은 그 전체이다.


  氣之本, 一而已矣; 而其升降飛揚, 感遇凝聚之際, 或大或小, 或正或偏, 或剛或柔, 或淸或濁, 自不能不千差萬別, 而隨其凝聚, 各爲一氣, 卽張子所謂: ‘游氣紛擾, 合而成質, 生人物之萬殊’者也. 雖曰各爲一氣, 所謂氣之本者, 固未嘗不卽此而在, 而各隨其所凝聚, 而發現焉. 如凝聚爲水, 則其潤而下者, 卽是氣之發現, 而成水之性焉. 凝聚爲火, 則其炎而上者, 卽是氣之發現, 而成火之性焉. 由其所遇之剛柔不同, 是以其性亦異. 然莫非是其生意之所爲也. 水之潤下․火之炎上者, 是氣之見於一端者; 而人之善則其全體也.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6a-6b)



3. 본체즉공부(本體卽工夫): 성(誠)․경(敬)의 합일적(合一的) 이해


  [해설]


  심성일치, 이기동실과 함께 녹문 철학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게 하는 이론은 본체즉공부의 수양론이다.  본체즉공부(本體卽工夫)란  내 마음 속에 도체의 완전한 모습이 구현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그 자발적으로 유행하는 도체에  나 자신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것으로서 수양을 이룸을 말한다. 이는 본체와 공부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상태에서 노력을 통해 본체에 다가가도록 하는 성리학의 수양론과는 상당히 다른 이론이다. 녹문은 공부가 곧 본체이고 본체가 곧 공부임을 알아야 비로소 경(敬)을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전통적인 성리학에서는 경(敬) 공부의 방법인 주일(主一)을 처사접물시(處事接物時)에 그것에 전일(專一)하여 마음을 흐뜨러뜨리지 않게 하는 노력으로 설명하였지만, 녹문은 주일(主一)의 일(一)을 인간의 심체(心體)로 이해하였으며, 그 일(一)에 주력하는 경(敬)은 심체(心體)를 그침없이 보존하는 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보존은 작위로서 하는 일이 아니며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도체(道體)인 성(誠)은 모든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림이 없는 것으로서 간단없이 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체(心體)를 보존하는 경(敬)은 부단히 유행하는 성(誠)과 동일한 것이다.  양자의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誠)이 공부의 대상인 본체를 말하는 것인 반면, 경(敬)은 공부의 주체인 인간의 입장에서 말한 것일 따름이다


  [원문 번역]


  (정자는) 또, “‘천지가 위치를 정하여 역(易)이 그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경(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경(敬)과 천(天)이 하나임을 말한 것이다.  심과 성과 기는 본체(本體)이므로 천․인(天人)에 걸쳐 본디 하나이지만, 경이라고 하는 것은 공부(工夫)인데, 천(天)도 또한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본체와 공부는 원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본체 가운데 공부가 있고, 공부 가운데 본체가 있는 것이다.  .....  대개 정자(程子, 明道)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아래의 ‘존존(存存)’이라는 두 글자를 발휘한 것일 따름이다.  ‘존존(存存)’이라고 하는 것은 보존하고 또 보존한다는 것이니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그것을 이어서 “경(敬)은 그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말이다.  정자(程子, 伊川)가 ‘경’이라는 글자를 표창하여 성학의 본령으로 삼은 것은 그 공이 이미 왕성하니, 경에 대한 논의는 주일(主一) 한 마디로도 지극하다.  하지만 이 말에 이른 연후에야 그 초탈․미묘하게 도체가 약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주일(主一)의 취지도 또한 이로 인해서 명석하여 남음이 없게 되니 이는 실로 천기(天機)를 누설한 것이다.


  又曰: “‘天地設位, 易行乎其中’, 只是敬”, 此又言敬之與天一也. 心也․性也氣也, 本體也, 天人固一也; 若夫敬則工夫也, 天亦有工夫乎? 曰: 本體․工夫, 元非二事. 卽本體而工夫在其中, 卽工夫而本體亦在其中 ..... 盖程子之爲此語, 非空中創說, 正由下句‘存存’二字, 發揮出來耳. 存存者, 存而又存, 卽不已之意也. 故下卽繼之曰: ‘敬則無間斷’, 此徹上徹下語也. 程子表章‘敬’字, 爲聖學本領, 其功固已盛矣. 若其論敬之說, 則‘主一’一語至矣. 然至此語, 然後乃見其超脫微妙, 道體躍如, 而主一之旨, 亦因而昭晳無餘. 其亦可謂太漏洩天機者矣.” (「存存龕記」, 『鹿門集』 권20 記, 50b-51b)


  내가 예전에 정자의 주일(主一)에 대한 가르침을 읽을 때에는 그것을  다만 ‘전일(專一)’이라는 뜻으로 보았었다.  그래서 설문청공(薛文淸公)5)이 이른 바, ‘첫 걸음을 내딛을 때 마음이 그 첫걸음에 있고, 두번째 걸음을 내딛을 때 마음이 그 두번째 걸음에 있다.’고 한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체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一)이라고 하는 것은 순일(純一)의 일(一)이니, 이것은 곧 성체(性體)이며 심체(心體)이다. ....  일(一)은 성(誠)이며, 주일(主一)은 경(敬)이니, 성(誠)과 경(敬)은 하나로되, 다만 능․소(能所)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余舊讀程子主一之訓, 只作‘專一’義看了, 如薛文淸公所謂‘行第一步時, 心在第一步上, 行第二步時, 心在第二步上’者. 晩驗之, 始覺其未然. 一只是‘純一’之一, 卽性體也․心體也. 一者誠也, 主一者敬也, 誠敬一也, 但有能․所之別耳.” (「主一銘」, 『鹿門集』 권 22 銘, 4b)




1)  임성주(任聖周): 숙종(肅宗) 37년(1711년) 충청도(忠淸道) 청풍(淸風)에서 출생. 22세 때에 사마시(司馬試, 生進科)에 합격하였고 39세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로 관직에 나아가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 임실현감(任實縣監), 사옹원(司饔阮) 주부(主簿) 양근군수(楊根君守), 성천부사(成川府使) 직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후에는 학문에 전념다가 1788년 공주 녹문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녹문선생문집』이 있다.


2) 李柬, 「未發辨」, 『巍巖遺稿』 권12 雜著, 26b


3) 李縡, 「答尹瑞膺」, 『陶庵集』 권10 書, 18b


4) 녹문은 자기 사상의 요지를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라는 두 마디 말로 대변하였는데(「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6a),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후자인 심성일치이다. 녹문의 관심은 본체론보다는 인성론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인성론에서 녹문이 확립하고자 한 것은 심․성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적인 심체(心體)의 존재였다.


5) 설선(薛瑄, 1392-1464)